[최준호의 SF인SF] ① 꿈꾸면 이루어진 미래
백발의 교수가 칠판에 무언가를 그리며 설명한다. 고깔모자를 쓴 학자들이 강의를 듣고 흥분하더니 여행복장으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한다. 장면이 바뀌고, 철공소 사람들이 미니버스 만한 포탄 모양의 무언가를 만든다. 다시 장면 전환, 여행복으로 갈아입은 사람들이 포탄 속에 들어가고, 그 포탄은 사람 키 두 배에 달하는 크고 긴 대포에 장착된다. 펑~ 소리와 함께 포탄이 발사돼 날아가더니 잠시 뒤 달님의 눈에 ‘퍽’박힌다. 기괴한 암석으로 둘러싸인 달 표면에 포탄이 도착하고, 6명의 신사가 내린다. 지평선 너머로 지구가 나타났다가 꼬리를 단 혜성이 지나가고 별님이 총총…. 구경을 마친 신사들은 다시 포탄을 타고 벼랑에서 떨어지듯 달나라를 떠난다. 풍덩~. 포탄은 바다에 떨어지는 방식으로 지구 귀환에 성공한다.
1902년 프랑스의 마술사이자 영화제작자 조르주 멜리에스(1861~1938)가 만든 흑백 무성영화 ‘달세계 여행’이다. 쥘 베른(1828~1905)의 소설 『지구에서 달까지』(1865)를 각색해서 만든, 최초의 과학소설(SF) 영화다.
그리고 반세기가 훌쩍 지난 1969년 7월16일 오후 1시32분. 미국 플로리다의 케네디우주센터 39A 발사대에 높이 110.6 m의 새턴Ⅴ 3단 로켓이 불을 뿜는다. 로켓의 최상단부에는 3명의 우주인을 태운 아폴로 11호가 올랐다. 목적지는 쥘 베른의 소설과 같은 달이다. 4일 뒤인 7월20일 오후 8시17분. 아폴로11호의 달착륙선이 달 표면 ‘고요의 바다’에 착륙한다. 닐 암스트롱 선장이 인류 최초로 달 표면에 발을 내딛는다. 100년 전 소설, 반세기 전 영화 속 상상이 현실로 구현되는 순간이었다. ‘포탄’을 타고 달을 향해 떠나는 것이나, 바다에 빠지는 방식으로 지구로 돌아오는 것이나 영화와 소설을 빼다 박았다.
결핍에서 욕망-상상-과학기술로
‘SF는 과학기술의 아버지’라고 하면 틀린 말일까. 인류 문명의 이기는 모두 상상에서 시작했다. 결핍이 욕망을, 그 욕망이 다시 상상을. 상상은 결국 과학기술을 낳았다. 그 상상이 언어와 영상으로 구체화된 게 SF다. 새를 보며 ‘나도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싶다’는 욕망이 비행기를 낳았다. 옥토끼가 산다는 달에도 가보고 싶다는 욕망이 달탐사까지 이어졌다. SF를 직역하면 ‘과학소설’이지만 한국사회에서는 흔히 ‘공상과학’으로 번역한다. 공상(空想)의 사전적 의미는 ‘현실적이지 못하거나 실현될 가망이 없는 것을 막연히 그리어 봄. 또는 그런 생각’이다. ‘현재 과학기술로는 터무니없는 상상 속의 과학’이라는 얘기지만, 과학기술은 그렇게 ‘괴짜 같은 터무니없는 상상에서 시작하는 법이다.
SF가 많은 세상이 과학기술의 선진국이다. SF소설과 영화가 유럽을 거쳐 미국에서 꽃을 피운 이유다. 오늘날 우주쓰레기를 걱정할 정도로 많아진 인공위성 역시 SF에서 시작했다. 영국 태생의 SF작가 아서 클라크(1917~2008)는 1945년 영국 잡지 ‘와이어리스 월드’(Wireless World)’에 ‘행성 밖에서 중계를 하는 방송’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논문 안에는 지구 밖에 정지한 채 국가 간의 통신을 전달해주는 위성에 대한 아이디어가 포함됐다.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가 지구 상공 577㎞ 궤도를 돈 것은 그로부터 12년 뒤인 1957년. 아서 클라크의 상상처럼 행성 밖 중계위성의 역할을 하는 정지궤도용 통신위성이 처음으로 발사된 것은 그로부터 다시 5년 뒤인 1963년이다. 아서 클라크의 ‘공상’이 20년 만에 현실이 된 것이다.
SF는 구현된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한걸음 더 진화해간다. 영국 출신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1894~1963)의 소설 『멋진 신세계』(1931) 는 인공부화연구소에서 태어난 사람 얘기에서 시작한다. 소설 속 신세계의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계급도, 할 일도 정해진다. 1997년 개봉한 영화 ‘가타카’(Gattaca)는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바탕으로 풀어낸 SF영화다. 유전자 조작으로 완벽하게 태어난 사람(디자이너 베이비)들이 사회 상층부를 이루고, 열등한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은 사회 하층부로 밀려나는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렸다. 영화 제목 ‘Gattaca’는 DNA를 구성하는 핵염기 구아닌(G)ㆍ아데닌(A)ㆍ티민(T)ㆍ시토신(C)을 조합해 만든 단어다. 유전공학이 완성되는 미래에는 DNA로 운명이 결정된다는 의미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절망·희망 뒤섞인 21세기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아폴로 계획을 한창 진행 중이던 1968년 스탠릭 큐브릭 감독은 SF영화의 원전으로 불리는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완성한다. 목성으로 향하는 우주선 디스커버리호가 등장하고, 긴 여행을 위해 동면에 들어간 과학자, 사람처럼 말을 하는 인공지능 컴퓨터 ‘HAL9000’이 등장한다. 인류가 구현할 수 있는 우주선의 속도와 지구~목성 간 거리를 계산해‘동면 여행’이라는 상상 속의 해법을 제시한다. IBM이 한참 컴퓨터를 진화시키던 현실을 바탕으로 인공지능을 상상한다. 영화 속 인공지능의 이름 ‘HAL’은 IBM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다. ‘IBM’알파벳 3개를 각각 하나씩 당겨 보면 HAL이 된다.
21세기. SF는 이제 이미 과학기술의 특이점(Singularity)를 넘어서고 있다. 그 속엔 끝모를 과학기술과 인류문명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희망ㆍ절망이 뒤섞여 있다. ‘인터스텔라’(2014)는 블랙홀과 4차원의 우주를 떠도는 인류의 이야기를 그렸다. ‘아일랜드’(2005)는 사람들에게 장기와 신체부위를 제공하는 목적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복제인간의 세계를 그렸다. ‘컨택트’(2016)처럼 지구를 찾은 외계인의 얘기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게 상상의 날개를 편다. 넷플릭스의 ‘블랙미러’는 시리즈를 통해 미디어와 정보기술 발달이 인간의 윤리관을 앞서나갔을 때의 다양한 부정적인 면을 다루고 있다.
한국도 이제 과학과 SF의 시대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는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상당수의 과학기술이 SF의 상상력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다”며 “당대의 과학자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일도 SF작가들은 마음껏 상상의 날개를 폈고 그것이 다시 미래의 과학기술자를 낳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20세기는 과학이 가져다 줄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지배적이었지만 사실 성찰이 결여된 시대였다”며 “21세기에 접어든 지금은 과학적 상상력보다 윤리적 상상력이 더 요구되는 시대이며 가장 활발하게 과학기술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지고 있는 분야가 SF”라고 덧붙였다.
중앙일보는 앞으로 SF영화와 소설 속의 과학과 미래 이야기를 연재를 통해 풀어나간다. 시리즈 제목 ‘SF인SF’는 SF 속 과학(science)과 미래(future)를 줄인 말이다. 마침 최근 한국도 국제 유인 달 탐사계획인 아르테미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등 늦깍이로 우주시대를 선언했다. 오는 10월은 순수 한국 기술로 만든 우주로켓 누리호가 처음 발사된다. 우연의 일치일까. SF영화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국내에 최근 선진국과 경쟁해도 어색하지 않은 SF영화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병든 지구와 우주궤도의 새로운 보금자리, 우주쓰레기 청소부 얘기를 그린 ‘승리호’(2월)와 줄기세포 복제 및 유전자 조작을 통해 만들어진 실험체 인간의 얘기를 그린‘서복’(4월)이 대표적이다. 가히 SF의 시대다.
최준호 과학ㆍ미래 전문기자, 논설위원 joo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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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1 21:00:00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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